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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속 3·1 운동 ⑩ 일제 치하서 울려퍼진 佛혁명가 라 마르세예즈



佛 신문 1919년 5월 보도…"한국학생들 독립 시위하며 라 마르세예즈 합창"
일간 뤼마니테 "일본 의회서도 가혹한 통치가 시위 촉발했다는 비판론"
식민 종주국 佛 언론·정부, 3·1운동 전개에 촉각…파리강화회의 영향 주시
※ 편집자주 = "조선 독립 만세".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한반도 전역을 울렸던 이 함성은 세계를 향한 우리 민족의 하나 된 외침이었습니다. 한민족이 앞장서 행동함으로써 제국주의에 신음하던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의 각 민족을 자각시켜 함께 전 세계적 독립운동을 끌어가자는 외교적 호소였습니다. 강대국의 이권 다툼이 판치던 당시 국제질서는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자격을 얻었던 일본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고만장하던 일본이 두려워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국제사회의 여론을 움직이는 외신 보도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3.1운동 초기 보도통제와 프레임 조작으로 관련 보도를 막는 데 그야말로 전력투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문제이지, 진실을 감출 순 없었습니다.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중국 상하이(上海)로부터 시작해 미국 샌프란시스코, 뉴욕, 워싱턴 D.C.에 이어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 러시아 모스크바, 브라질 상파울루, 싱가포르로 3·1운동 소식은 요원의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길지 않은 기사도 많았지만 이에 자극받은 각 식민지 국가에서는 앞다퉈 독립선언문이 나오면서 민족적 독립운동이 촉발됐습니다. 비록 한민족이 자립(自立)에는 실패했지만, 외신의 창(窓)을 통해 민족 자결과 독립에 대한 세계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에 포진한 특파원망을 총동원해 당시 외신 보도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보도합니다. 지금까지 3·1운동을 보도한 외신 일부가 부분적으로 소개된 적은 있지만, 세계 주요국 별로 보도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굴해 소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관련기사>
외신속 3·1 운동 ① 그 날 그 함성…통제·조작의 프레임 뚫고 세계로 http://www.yna.co.kr/view/AKR20190207090000009?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② 日언론엔 폭동뿐…총독부 발표 앵무새 전달 http://www.yna.co.kr/view/AKR20190213157000073?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③ 상하이서 첫 타전…은폐 급급하던 日, 허 찔렸다 http://www.yna.co.kr/view/AKR20190214084600097?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④ 韓人 여학생이 띄운 편지, 대륙의 심금을 울리다 http://www.yna.co.kr/view/AKR20190208154700089?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⑤ 샌프란發 대서특필…美서 대일여론전 포문 열다 http://www.yna.co.kr/view/AKR20190214006800075?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⑥ 美 타임스스퀘어에 울려퍼진 독립선언…세계가 눈뜨다 http://www.yna.co.kr/view/AKR20190215013400072?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⑦ WP "선언문 든 소녀의 손 잘라내"…日편들던 워싱턴 충격 http://www.yna.co.kr/view/AKR20190216018300071?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⑧ 러 프라우다·이즈베스티야도 주목…"조선여성 영웅적 항쟁" http://www.yna.co.kr/view/AKR20190217045600080?input=1195m
외신속 3·1 운동 ⑨ 영일동맹 허울에 英언론 日 받아쓰기 그쳐 http://www.yna.co.kr/view/AKR20190212161500085?input=1195m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한국의 학생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시위하며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노래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발행된 프랑스 신문 알제의 메아리는 1919년 5월 9일자에서 "젊은 한국인들이 라 마르세예즈를 노래했다. 한국의 옛 수도 Sonds(개성)에서 200명의 호스톤 여자기숙학교 학생들이 3월 1일 처음으로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다. 이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시위를 벌였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이 소식이 서울에서 중국의 목소리로 보내진 서신에서 언급됐다고 소개했는데, 중국의 목소리는 당시 극동 문제를 주로 다룬 프랑스 신문이었다.
한국 학생들이 불렀다는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혁명 직후인 1792년 4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이 프랑스를 침공하려 했을 때 알자스지방에 주둔하던 공병대 대위 루제 드 릴이 작사·작곡한 행진곡이다.
"일어서라 조국의 젊은이여, 영광의 날은 왔다. 자아, 진군이다. 놈들의 더러운 피를 밭에다 뿌리자" 등 조국을 침탈하려는 무리에 대해 호전적이고 혁명정신을 고취하는 가사로 유명하며 지금도 프랑스의 국가로 불린다.
3·1운동에 참여한 한국의 학생들이 프랑스의 혁명과 전쟁의 역사로부터 일정 부분 영향을 받은 정황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3·1운동 당시 개성의 여학생들이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다는 사실은 프랑스의 원로 한국학자 마크 오랑주 전 콜레주드프랑스 한국학연구소장이 과거 논문에서 밝힌 적이 있지만, 국내 학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또 다른 프랑스 신문 르 라디칼도 앞서 그해 3월 20일자 신문에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심각한 소요사태가 일어났다고 전했다.
급진적인이라는 뜻의 제호를 가진 이 신문은 "서울의 소식을 전하는 출판물이 도쿄에서 현재 금지됐으며 3월 1일부터 한국에서 일어나는 시위는 한국의 국가적 독립을 목표로 조직된 운동의 일환이다"라며 비교적 객관적으로 3·1운동을 알렸다.
특히 이 신문은 "기독교로 개종한 한국인들의 주도로 대규모 운동이 촉발됐다"
고 보도해 3·1운동에서의 개신교도들의 역할에 주목하기도 했다.
신문 악시옹 프랑세즈도 3월 20일 상하이발(發) 로이터통신 기사를 인용해 3·1 운동 소식을 신속히 전했다.
"수천 명의 한국인들이 서울의 거리를 뛰어다녔다. 수백명은 한국의 황제(고종)의 시신이 있던 궁까지의 길을 열어젖히고 한국의 독립을 부르짖었다. 특히 학생들이 돋보였다. 서울에서 수백명이 체포됐지만, 경찰서도 습격당했다. 서울과 의주, 진남포에 군대가 소집됐다"고 전했다.
신문은 특히 "이 심각한 사태는 (파리) 강화화의에서 (열강들이) 한국의 독립을 제재한 뒤 널리 퍼진 여론에 의해 일부 촉발됐다"고 써 당시 열강들의 식민지배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3·1운동 촉발에 영향을 줬다는 점을 짚었다.
1차대전 직후 승전국들이 파리에 모여 전쟁재발 방지와 식민지 문제를 논의한 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는 당시 열강으로 연합국 편에 있었던 일본에 밀려 논의 대상에서 끼지 못했었다.
프랑스 일간지 뤼마니테(LHumanite)는 4월 13일자 상하이발 기사에서 3·1운동을 혁명이라고 칭했다.
"한국의 독립운동이 여전히 강고하게 지속되고 있다. 일본 당국이 가혹한 탄압을 하고 있으며 혁명의 희생자 수가 이미 상당하다."
이 신문은 이어 4월 20일 통신사 라디오의 보도를 인용한 후속 기사에서는 일본 의회에서도 3·1운동이 일본의 가혹한 통치방식에 의해 촉발됐다는 목소리가 있다고 전해 눈길을 끈다.
신문은 "한국에서의 조사 이후 의원들이 의회에 한국의 혁명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면서 "의원들은 일본이 한국에 적용한 통치방식에 의해 사태가 촉발됐으며, 한국인들은 언론의 자유의 완전한 억압과 빈곤층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엄청난 세금의 희생자들"이라고 전했다.
뤼마니테가 식민지국가들의 해방 투쟁에 호의적인 프랑스 공산당의 기관지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처럼 일본에서조차 가혹한 통치방식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음을 전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평가된다.
이밖에 자유인이라는 뜻의 프랑스 신문 옴 리브르와, 르 골루아 등이 로이터통신을 인용해 3·1운동의 전개상황을 연이어 보도했다.
자국 신문들의 보도와 별도로 프랑스는 정부 차원에서 일본과 중국의 언론들에 비친 3·1운동 동향을 공보(bulletin) 형태로 꾸준히 정리해 놓았다.
가령, 프랑스 외교·전쟁부는 1919년 4월 1일자 중국 정기간행물 공보에서 중국 언론의 보도와 일본 정부의 공식 설명을 인용해 3·1운동의 전개상황을 상세히 소개했다.
프랑스 외교부는 "3·1 운동 지도부는 (파리) 강화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려고 하며, 윌슨의 원칙(민족자결주의)을 자신들의 불행한 조국에 적용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윌슨의 프린스턴대 제자인 이승만이 이를 위해 뛰고 있으며 김 박사(김규식)와 안씨(M. An)라는 두 한국 대표와 파리에서 합류한다"고 덧붙였다.
프랑스 정부가 중국과 일본 언론 동향에서 한국 상황을 이처럼 예의주시하는 것은 당시 인도차이나 등지에 광대한 식민지를 거느렸던 식민모국으로써 식민지해방투쟁의 확산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프랑스는 1차대전의 주요 승전국으로, 당시 자국에서 열리고 있던 파리강화회의의 의제설정 등에 주도적 역할을 하던 터라 3·1운동을 무시할 수 없던 처지였다.
재불 독립운동사학자 이장규씨(파리 7대 한국학 박사과정)는 "프랑스는 3·1운동의 영향이 인도차이나로 번지는 것을 우려하는 한편, 강화회의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일본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우리 대표단의 호소를 묵살했다"면서 "일본의 왜곡된 선전에 편승한 몇몇 언론이 3·1운동을 평가절하하기도 했지만 많은 프랑스 언론이 비상한 관심으로 상당한 양의 보도를 쏟아냈다"고 설명했다.
yongla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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