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민의명저큐레이션] 역사는 만남이다

“이제는 각자가 자신의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닦기 위해 역사의 자갈들을 다시 사용해야 한다. 국가와 가정 같은 뿌리로는 부족하다. 자신은 부모들과는 다르며 (…) 자신이 나아가는 방향을 알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기억이 필요하다. 뿌리로부터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정말 거의 없다.”(시어도어 젤딘의 ‘인간의 내밀한 역사’ 75쪽)
젤딘은 베스트셀러 ‘인생의 발견’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영국의 석학이다. 그는 정치와 제도 중심의 역사학에 반발해 개인의 역사를 강조해 왔다. 2005년에 국내에 번역된 ‘인간의 내밀한 역사’는 이런 그의 시도가 담긴 대담한 여정이다. 희로애락의 좁은 감정, 수원이 풍부하지 않은 과거 경험, 돌처럼 단단한 출신 집안의 내력 바깥으로 잘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에게 그는 ‘왜 귀를 막고 있어. 어쩌면 이웃집 아주머니가, 선생이, 옆집 처녀가 상상력의 보고일 수도 있는데’라고 반문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태생의 뿌리는 무겁고 질긴 것이다. 거기서 인생의 의미를 끌어올려 보고자 평생을 허비하기도 한다. 그런 그들에게 저자는 ‘내가 먼저 세상 사람들을 만나보고 이야길 들려줄게. 그들이 네 영혼의 동료일지도 몰라. 프로이트, 마르크스, 지라르는 한 부분을 강조하느라 큰 걸 놓쳤을지도 모르고’라고 속삭인다.

저자는 이 책을 위해 프랑스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며 동시대의 수많은 사람을 만나보았다. 이 책은 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역사서다. 개개인을 전면에 내세우니 가문, 마을, 국경은 멀어지는 가운데 고독, 공포, 호기심, 사랑 같은 내밀한 감정이 쏟아져 나온다. ‘남성과 여성이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게 된 경위’와 같은 소제목은 궁금증을 자극하기도 한다.

책의 첫 번째 인터뷰 대상인 줄리엣은 “제 인생은 실패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녀의 삶은 평생 침묵에 갇혀 있었다. 남의 집 식모로 늙은 그녀는 매일 집주인과 접촉하지만 둘은 서로의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관계는 피상적이었고 대화는 침묵과 다를 바 없었다. 줄리엣은 자신의 잿빛 인생이 괴로웠다.

또 다른 인터뷰 대상 콜레트는 벼룩을 찾듯 납세자의 장부를 꼼꼼히 뒤지는 세무조사관이었다. 한번은 엄청난 빚을 지고 투병 중인 세금 미납의 시민을 찾아가 납세를 독촉해야 했다. 불행히도 그 세금미납자는 독촉을 받고 얼마 후 사망했다. 콜레트는 자신의 갑질을 예민하게 느꼈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곧 엄청난 외로움을 느꼈다. 콜레트에게는 대화가 절실했다.

저자는 방대한 지식과 화술을 통해 이들의 삶을 종횡무진하며 현대판 소크라테스를 흉내 낸다. 아니 세계를 여행하면서 만난 숱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여성들을 소크라테스로 환생시킨다. “만남으로부터 이로움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완전하게 살았다고 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가 만난 이들의 삶은 대개 구멍이 숭숭 나 있다. 나름대로 자신의 세계를 일궈냈다고 자부하는 인물도 꽤 되지만 그들의 말은 때론 앞뒤가 안 맞고, 우울과 불안의 기색도 엿보인다. 하지만 조각보를 만들 듯 이들 삶의 경험과 선택을 이어 붙여보니 그게 역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사는 불완전한 것들의 만남이라고 ‘내밀한 역사’는 알려준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허블검색
허블검색1